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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유형지에서’

뚝틀이 2013. 6. 19. 00:56

Franz Kafka, 1914, ‘In der Strafkolonie’ 영문 제목은 ‘In the Penal Colony’

  

“이것은 참 독특한 장치죠. Es ist ein eigentümlicher Apparat.” 자기가 잘 알고 있는 기계wohlbekannten Apparat를 경탄하듯 들여다보며, 장교가 탐구여행자에게 기계의 성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나무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가파른 경사지로 둘러싸인 작고 깊고 모래뿐인 계곡. 장교와 여행자를 제외하고 여기 있는 사람은 적어도, 머리카락은 다 빠지고 얼굴엔 핏기가 없는 그 입을 삐쭉 내밀고 있는 어리벙벙한 모습의 죄수와 그를 지키는 병사. 그 병사가 잡고 있는 무거운 사슬, 거기에서 가는 사슬들이 가지 치듯 갈라져 나와 죄수의 목과 발 또 손가락관절을 조이고 있는데, 또 이 각각은 다시 서로 사슬로 연결되어 있고.

Wenigstens war hier in dem tiefen, sandigen, von kahlen Abhängen ringsum abgeschlossenen kleinen Tal ausser dem Offizier und dem Reisenden nur der Verurteilte, ein stumpfsinniger, breitmäuliger Mensch mit verwahrlostem Haar und Gesicht und ein Soldat zugegen, der die schwere Kette hielt, in welche die kleinen Ketten ausliefen, mit denen der Verurteilte an den Fuss- und Handknöcheln sowie am Hals gefesselt war und die auch untereinander durch Verbindungsketten zusammenhingen.

거의 직역에 가깝게 번역해보자면 이런 수수께끼처럼 이상한 문장이 된다. 이것이 언어문화의 차이. 영어라면 짤막짤막한 ‘의사전달’ 위주의 문장이 되었을 텐데, 독일인들은 이렇게 ‘하나의 짜인 문장’으로 엮어야 속이 시원한 모양이고, 그들의 말을 빌자면 이런 ‘짜임새’로부터 그들의 철학이 또 과학이 나온단다. 프라하에서 태어난 유대인인 카프카 역시 독일 문화권의 작가이니, 그의 소설을 읽을 때 마치 법률문서 대할 때처럼 머리가 지끈지끈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거기에 또 상징성이란 수수께끼풀이까지 염두에 두어야 하니....

(흥미로운 사실 하나, 소설 첫 문장에서만 탐구여행자Forschungsreisender란 단어, 그 후엔 계속 그냥 여행자Reisender. 무엇을 탐구하는 사람인지는 소설의 진행과 함께 점점 명확해진다.)

 

여행자는 기계에 그다지 흥미를 못 느끼는데, 장교는 연신 사다리로 위아래를 오르내리며 기계 작동준비에 여념이 없다. 저런 일은 사실 기능공에 맡겨야하는 것 아닌가, 하는 여행자가 속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장교는 마치 이 일이 그 누구에게도 맡길 수 없는 성격이라는 듯 땀 뻘뻘 흘려가며 열심이다. 제복을 입고 일하는 그의 모습이 안 돼 보여 “날이 너무 덥죠?” 여행자가 묻는다. 자기는 조국의 안전을 위해 이렇게 일하는 것이라는 그의 대답. 기름범벅 손을 닦아내며 그가 말한다. 여기까지는 수작업이었지만 이제부터는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진행되죠. 이 기계는 12시간 동안 착오 없이 작동되어야 하거든요. 물론 가끔 작은 말썽이 일어나곤 하는데, 그런 경우엔 제가 즉시 대처하곤 하죠.

 

참, 앉으시죠. 어지럽게 쌓여있는 의자더미에서 하나를 꺼내어 펼치며 장교가 권한다. 마지못해 응하며 주위를 둘러보는 여행자, 그의 눈에 들어오는 이곳의 구조. 한쪽엔 높은 흙더미, 그 옆으로 작은 도랑, 그리고 도랑 이쪽에 이 기계. 사령관이 이 기계에 대해 설명해주던가요? 아니요. 그의 설명. 이건 전 사령관의 발명품Erfindung이다. 초기 버전부터 나도 함께 개발했지만 물론 모든 공은 그의 것이다. 사실 이 기계뿐 아니라 여기 유형지전체의 시설들이 그의 작품이다die Einrichtung der ganzen Strafkolonie ist sein Werk. 그가 죽었을 때 우리는 이 유형지가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되었음을 알았다. 아무리 많은 후임자가 와도 개선책 그런 것은 내놓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이 장교에게 전임사령관은 거의 신적존재.

 

이어지는 기계에 대한 장황한 설명.(이 설명만 듣고도 적어도 이런 ‘기계모양’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자세히) 하지만, 병사와 죄수가 알아듣지 못하도록 佛語로. 병사는 죄수를 묶은 사슬을 양손으로 감아쥐고 그 손을 총 위에 올려놓고um beide Handgelenke die Kette des Verurteilten gewickelt, stützte sich mit einer Hand auf sein Gewehr,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데, 죄수는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 귀를 기울이는 표정.

눈부신 햇살을 손으로 가려가며 기계를 올려쳐다봐야 할 정도의 이 큰 구조물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아래에는 죄수를 눕히는 침대Bett(거기에는 죄수가 괴로움을 못 이겨 혀를 깨무는 등 자해방지용 재갈도), 그 위 2m 쯤 높이에 ‘제도장치Zeichner’가 있고, 가운데 부분은 써레Egge모양. 모두가 정교한 장치.

 

잠깐 숨을 고르는 사이, 판결은 어떻게 내려지나요, 묻는 여행자. 그 물음에 놀라는 장교. 사령관이 그것조차도 설명하지 않았어요? 고귀하신 분이 방문했는데도 말에요? 고귀란 단어를 빼놓고 이야기하자는 부탁에도 불구하고 그 단어 계속 반복해가며 분을 참지 못하는 장교. 그건 거의 ‘직무유기’에 해당한다고. 마치 자기가 대신 사과라도 하려는 듯, 그가 꺼내는 전 사령관이 작성한 도표. 놀란 여행자의 물음. 도표요? 그럼 그 전 사령관이라는 사람이 군인Soldat이요, 판사Richter요, 엔지니어Konstrukteur요, 화학자Chemiker요, 제도사Zeichner요, 그 모두의 집합체alles in sich vereinigt였단 말인가요? 그의 대답, 물론이죠.

 

도표 대신 작은 가죽지갑을 꺼내드는 그, 판결문은 써레 속에 들어있는 죄수의 맨몸에 쓰이게 되죠. 예를 들어 이 자의 경우에는 “상관을 존경해라! Ehre deinen Vorgesetzten!입니다. 죄수 쪽을 돌아보니, 입을 삐쭉 내밀고 있는 그를 봐서는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듯. 저 사람이 자기 죄를 알고 있나요? 라는 물음에, 아뇨 라는 대답. 예?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는데 죄인이라고요? 이번엔 오히려 여행자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는 장교의 설명. 이제 자기 몸에 쓰이는 판결문을 읽으며 그 죄를 알게 되죠. 뭐요? 분노에 몸을 벌떡 일으키는 여행자. 자신을 변호할 기회는 가졌었어야죠. Er muss doch Gelegenheit gehabt haben, sich zu verteidigen,

 

여행자의 팔을 잡고, 답답하다는 듯, 죄수를 가리키는 장교. 일은 이렇게 된 거예요. 여기서는 제가 재판관이죠.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말에요. 제 원칙은 이렇습니다. ‘죄는 의심할 바가 아니다.Die Schuld ist immer zweifellos.’ 다른 데서는 그렇지 못하죠. 재판관이 여럿이거나 상급재판소가 있다거나 그래서 말이에요. 여기서는 그렇지 않아요. 물론 신임사령관이 몇 번 내 재판에 끼어들려 했었지만, 난 완강히 거부했죠. 이 자도 다른 사건들처럼 명백한 경우에요. 이 자는 대위의 당번병인데 그의 의무는 매 시 종이 울릴 때마다 대위의 방에 경례를 붙이는 거였어요. 뭐 그렇게 어렵지도 않은 일이죠. 그런데 오늘 두 시에 대위가 내다보니 이 자가 잠들어 있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대위가 채찍으로 내려쳤더니, 잘못했다고 빌기는커녕 그 채찍을 놓지 않으면 물어뜯겠다면서 이 자가 대들었다는 거예요. 한 시간 전에 대위가 저에게 왔고, 난 그의 진술을 받아 적고, 아예 판결문까지 다 쓴 다음, 이 자를 체포해와 이렇게 쇠사슬로 묶어놓았죠. 제가 만일 소환 절차를 밟았더라면 이 자는 분명 거짓말을 준비해 놓았을 테고, 제가 그걸 밝혀낸다 하더라도 그 사이에 또 다른 거짓말을 준비해 놓았을 거예요. 제가 체포해놓은 이상 이 자는 절대 풀려나지 못합니다. 참, 시간이 없네요. 아직 이 기계에 대한 설명을 끝내지 못했지만, 이제 형을 집행할 시간이 점점 가까워지네요.

 

여기보세요. 써레의 이쪽이 상반신을 덮고, 이쪽이 다리를 덮지요. 이 칼은 머리에 닿고요. 대충 이해가 되죠? 이어지는 그의 설명에도, 이곳 재판절차에 대한 불만 때문에 찌푸린 얼굴을 펼 수가 없는 여행자. 물론 여기가 유형지라는 그런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이건 너무 심하지. 글쎄 신임 사령관에게나 희망을 걸 수 있을까? 사령관이 입회 올 것이냐 물으니, 그럴지도 모르기 때문에 집행을 서둘러야 한다는 그. 그래서 아주 중요한 요점만 설명하겠다고. 상반신을 덮은 써레에서 바늘이 나와 살갗을 찔러가며 판결문을 쓰기 시작하지요. 그런데 피고가 자기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아야 할 것 아녜요? 그래서 여기에 거울을 만들었죠. 여기를 들여다보세요. 긴 바늘과 작은 바늘이 있죠? 긴 바늘은 글씨 쓰는 용이고 짧은 바늘에선 물이 뿜어져 나오죠. 피를 씻어내 피고가 자기 죄목을 읽을 수 있게끔 말이죠. 하도 역겨워 다시 자리에 앉으려 여행자가 고개를 돌리다 화들짝 놀란다. 죄수도 옆에 와 그 설명을 같이 듣고 있었던 것. 화가 난 장교가 손에 흑 한 줌 집어 병사에게 던지자, 병사가 깨어나 쇠사슬을 당기고, 그 갑작스런 힘에 죄수는 쓰러지고...

 

이제 동작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다며 장교가 스위치를 넣는데 기계는 이상한 소리만 낼 뿐 돌아가질 않는다. 워낙 복잡한 기계라서... 변명하며 설명을 이어가다 (‘너무’ 끔찍한 장면을 ‘지나치게’ 자세히 묘사하는 이 부분은 생략) 판결문으로 쓰이는 글자의 모양을 보여주는데 전혀 쉽게 알아볼 수 그런 모양이 아니다. 형 집행은 12시간 몸을 빙글빙글 돌려가며 바늘로 찔러 죄상을 기록하는 형태로 계속되는데 그 시간동안 내용을 읽어야 하니 쉽지 않은 모양으로 쓰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그의 설명. 하지만 사실상 6시간 넘겨 견디는 자는 거의 없다고.

 

이제 피고를 눕히고 형 집행 시작. 사슬을 풀고, 옷을 벗기고, 써레로 덮고... 역시 또 고장. 장교의 푸념. 전 사령관은 별도의 전용 예산을 만들어 줄 정도로 적극적이었는데, 새 사령관은 부품이 정말로 고장 났는지 일일이 확인하고, 새 부품 조달에도 질질 시가늘 끌고....

 

정의를 위해 나서야 하는 여행자. 하지만 그의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 낯선 세계에서 불쑥 나서기란... 자기는 여기 유형지 사람도 아니고 또 이 유형지가 속해있는 나라의 국민도 아니니Er war weder Bürger der Strafkolonie, noch Bürger des Staates, dem sie angehörte, 이 형 집행을 비난하거나 방해하려 하면, 사람들이, 그대 이방인이여 조용히 하라Du bist ein Fremder, sei still. 할 것이고(독일인들에게 있어서 이 이방인 Fremder란 단어는 우리말로 번역할 수 없을 정도의 매우 적대적인 개념), 그럴 경우, 자기의 여행이 남의 형법을 바꾸려는 것um fremde Gerichtsverfassungen zu ändern이 아니라, 그냥 관찰만 하려는 그런 의도nur mit der Absicht zu sehen라는 사실을 인정하며, 아무런 반박근거도darauf hätte er nichts erwidern, 없으니...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이 재판의 부당성과 비인간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고, 자기와 아무 상관도 없는 이 죄인을 자기의 이해관계 때문에 비호한다고 오해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더구나 자기는 고위관리로부터의 편지도 지니고 있는데, 사실 어쩌면 그가 이 형 집행에 참관하게 된 것도 그들이 여기에서 어떤 정의인가를 구하고 있다는 신호일 수도 있고, 이제 신임 사령관도 이런 절차에 불만인 것도 알게 되었으니...

생각에 잠겨있는 여행자의 귀에 들려오는 장교의 고함소리. 이 자가 토했다고. 내 기계가 더럽혀졌다고. 죄수의 옷을 잘라내 그것으로 오물을 닦아내려 애쓰는 병사.

 

조용히 이야기 좀 나눌 수 있겠냐는 장교. 솔직히 이야기하는데, 이 형 집행과정을 지지하는 사람은 이제 오직 나뿐이죠.Ich bin ihr einziger Vertreter. 전 사령관이 살아 있을 때 그렇게 많던 지지자들이, 내가 설득력이 부족한 탓인지 모두 숨어버렸어요. 하지만 난 복잡한 재판과정 그런 것은 싫거든요. 그래서 내 온 힘을 다해 지금 방법을 지켜낼 거예요. 이제 당신에게 묻노니Und nun frage ich Sie, 이 필생의 사업을 신임 사령관이나 그에게 영향을 미치는 부인 때문에 접어야 되는 건가요? Soll ein solches Lebenswerk wegen dieses Kommandanten und seiner Frauen, die ihn beeinflussen, zugrunde gehen? 그래도 되나요? Darf man das zulassen? 당신이 비록 우리 섬에 단 이틀간 머문 외부인일 뿐이라도 말이죠?Selbst wenn man nur als Fremder ein paar Tage auf unserer Insel ist? 사람들이 지금 뭔가를 꾸미고 있어요. 지금 사령부에서 회의가 열리고 있는데, 나만 초대 못 받았거든요. 그 비겁자들이 당신을 이방인을 내게 보낸 거예요.

 

전에 이 집행을 보셨어야 했어요. 그때는 집행일에 이 계곡이 사람들로 넘쳤죠. 고위층도요. 기계도 반짝반짝 윤이 났고요. 지금은 금지된 독한 약물을 바늘 끝에 발라 쓰곤 했는데, 많은 이들이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곤 했죠. 들리는 것은 오직 죄인의 신음뿐. 정의구현의 현장이었죠. 원하는 누구에게나 앞자리를 줄 수는 없는 일이지만, 사령관의 배려로 어린이에게는 우선권을 줬죠. 내 양 손에 아이들을 안고 형을 지켜본 적도 있어요. 아 그 시절! Was für Zeiten!

 

이 장교, 지금 자기가 누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 모양. 여행자를 포옹하고 그의 어깨에 고개를 묻는다. 그 사이 청소를 끝낸 병사.

제정신으로 돌아온 장교. 과거의 영화 그 회고에 당신을 강제로 끌어들이자는 뜻은 아니에요. 비록 수백 명의 구경꾼이 몰려드는 그런 일은 이제 없지만, 그래도 기계는 제대로 돌아가고 있지 않아요?

여행자가 자기에게서 고개를 돌리자, 이 장교, 여행자가 자기 말에 감격해 계곡을 둘러보는 줄로 착각한 모양. 그의 손을 잡고 돌려 세우며, 이 치욕을 아시겠어요? Merken Sie die Schande?

동의 않고 가만있는 여행자에게, 들려주는 그의 이야기. 어제 사령관이 당신을 초대했을 때 근처에 있었다. 난 사령관을 안다. 그 비겁자는 존경받는 외부인ein angesehener Fremde의 의견이라는 힘을 빌려 날 몰아내려 하고 있다. 어쩌면 당신은 유럽식 사고방식에 젖어 사형제도 자체에 반대할 지도 모른다. 또 이렇게 고장 난 장치로 형을 집행하는 안쓰러운 모습을 싫어할 지도 모르고. 또 내 방법이 옳지 않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고. 어쩌면 당신이 고국에서라면 했을 그런 강한 의견을 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사령관이 원하는 것은 그저 지나가는 한마디 그 정도로도 충분하다. 우리네선 재판제도가 달라요Bei uns ist das Gerichtsverfahren ein anderes. 또는 선고 전에 심문절차가 있지요Bei uns wird der Angeklagte vor dem Urteil verhört. 또는 고문은 중세에나 있었던 일입니다Bei uns gab es Folterungen nur im Mittelalter. 뭐 그런 식의 코멘트. 그러면 사령관이 달려 나와 외칠 것이다. 각국의 재판제도를 실사한 한 위대한 유럽 탐구여행자가 방금 우리의 재판제도가 낡은 관습에 의존하는 비인간적인 것이라 평했다. 나는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오늘부로 포고하노니... 뭐 이런 식으로 말이죠.

 

당신이 그 깊은 통찰력으로 이 과정을 비인간적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적이요 인류를 위한 방법이라 보고한다 해도 그것 역시 이젠 너무 늦었어요. 당신은 여자들로 가득 찬 발코니에 나가지도 못할 것이고, 주의도 끌지 못할 것이고, 소리를 지른다 하더라도 어떤 여자의 손이 당신의 입을 막을 것이니까요Sie wollen schreien; aber eine Damenhand hält Ihnen den Mund zu .

 

여행자는 웃음을 참는다. 그렇게도 어렵게 생각되던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리다니. 점잖게 풀어나가는 그. 당신은 나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하고 있군요Sie überschätzen meinen Einfluss. 사령관은 이미 알고 있어요. 제가 이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라는 것을요. 또 제가 어떤 의견을 피력한다 해도 그건 아마추어의 의견일 뿐이죠.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사령관이 그렇게 반대한다면, 그렇게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는 그가 반대한다면, 내 무슨 의견 따위엔 신경 쓸 필요도 없이, 그냥 이쯤에서 끝내는 것도 좋을 듯싶군요.fürchte ich, ist allerdings das Ende dieses Verfahrens gekommen.

장교가 이 말을 이해했을까? 천만에. 자기는 사령관의 의도를 역이용하겠다며, 자기의 설명을 들었고Sie haben meine Erklärungen angehört, 기계를 봤고die Maschine gesehen 또 이제 형 집행을 지켜볼 테니die Exekution zu besichtigen. 힘이 되어 달라는 그Bitte helfen Sie mir.

제가 어떻게..... 당신을 해칠 수 없듯이 당신을 도울 수도 없다는 여행자.Wie könnte ich denn das, das ist ganz unmöglich. Ich kann Ihnen ebensowenig nützen als ich Ihnen schaden kann.

 

주먹을 불끈 쥐며 애원하는 장교. 이렇게 부탁하자고, 누가 묻기 전에는 말을 하지 말 것이며, 꼭 대답을 해야 하는 경우에도, 맞습니다. 집행 장면을 봤죠.Ja, ich habe die Exekution gesehen,라던가, 충분히 설명을 들었죠.Ja, ich habe alle Erklärungen gehört., 라는 식으로 끝내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아Nur das, nichts weiter, 당신의 속마음을 추측할 수 없도록 말이죠. 그들이 이제 회의를 열 텐데 거기로 당신을 초대할 것입니다. 만일 무슨 이유에서든 그렇지 않다면 요구하세요. 틀림없이 그 요구는 받아들여 질 것입니다. 사령관은 웃으며 말할 겁니다. 고매하신 당신의 의견을 듣고 싶다고요. 이야기 하세요. 외치지 않아도 됩니다. 바로 앞에 있는 관리나 겨우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게 얘기해도 되요. 하지만 집행현장에 참여자가 적다거나von der mangelnden Teilnahme an der Exekution 바퀴가 삐걱거린다거나von dem kreischenden Rad 벨트가 찢어졌다거나dem zerrissenen Riemen 그런 것은 직접 이야기하지 마세요.Sie müssen gar nicht selbst reden, 나머지는 제가 맡죠.alles weitere übernehme ich, 하도 그가 목소리를 높여 열변을 토하는 바람에 죄수와 병사도 그를 보고 있다. 하지만 그들도 뭔가를 이해했을까? 그건 모를 일.

 

처음부터 여행자의 대답은 정해졌던 것. ‘아니오.’가 제 대답이죠. 눈을 깜빡거리지만 시선을 떼지 못하는 장교에게 이어지는 여행자의 말. 전 한 동안 망설였었죠. 이게 내가 개입할 일인가. 내가 개입해서 뭐가 변할 수 있을까 하고요. 전 이 시스템에 반대입니다. 저에게 주어진 어떤 가능성도 놓치지 않을 생각입니다. 당신의 설명을 듣고 그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이 대답에 멍해진 장교는 고개를 돌리고 기계 쪽으로 가 이 구석 저 구석을 들여다본다. 죄수와 병사의 눈에는 안도의 빛이 보인다. 묶여있는 죄수가 병사에게 무엇인가 작은 소리로 이야기 하자, 구부정한 자세로 듣고 있던 병사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장교에게 다가간 여행자가 말을 잇는다. 전 제 의견을 사령관에게 명확히 이야기 할 것입니다. 하지만 공개적으로가 아니라 사적으로요. 전 또 위원회에 불려가는 그런 일이 생길만큼 그렇게 오래 여기 머물러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ich werde auch nicht so lange hier bleiben, dass ich irgendeiner Sitzung beigezogen werden könnte. 내일 아침 일찍 배에 오르겠습니다.ich schiffe mich morgen früh ein.

 

제가 당신을 확신시켜드리지 못했군요. 장교가 웃는다. 마치 노인이 아이의 잘못을 보고 웃듯이, 그 뒤에 무슨 깊은 생각이 숨겨져 있듯이.

 

넌 자유야Du bist frei. 장교가 죄수에게 말한다. 믿지 못하겠다는 그의표정. 넌 이제 자유란 말이야Nun, frei bist du. 죄수의 표정에 처음으로 생기가 돌아온다. 진짜Wahrheit일까? 아니면 변덕nur eine Laune? 아니면 여행자가 장교에게 관용을 부탁해? 그 이유가 무엇이든, 어쨌든, 이제 죄수가 공간이 허용하는 한 몸을 흔들어댄다. Er begann sich zu rütteln, soweit es die Egge erlaubte. 야! 벨트 찢어지겠다. 풀어줄 테니 기다려. 죄수가 말없이 웃으며 왼쪽의 장교와 오른쪽의 병사를 본다. 물론 여행자에게 눈길을 주는 것도 잊지 않고. 이 자를 조심해 꺼내. 장교가 명령한다. 죄수의 성급한 몸 움직임으로 이미 그의 등에 상처가 난 상태.

아까 그 가죽수첩을 다시 꺼내들고 읽어보라는 장교. 무슨 글자인지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여행자. 그가 풀어주는 암호, 그 판결문은 정의로워라.Sei gerecht!

제도기의 톱니바퀴 장치에 조심스럽게 입력하는 장교. 그 장면을 올려다보는 여행자.

 

풀려난 죄수. 더럽혀진 셔츠를 차마 그냥 입을 수 없어 물통에 휘휘 헹구고 몸에 걸친다. 잘려져 나간 옷을 입은 그의 모습에 병사가 웃자, 마치 자기에게 그를 즐겁게 해줘야하는 의무라도 있듯이 죄수는 몸을 돌려가며... 하지만 엄숙한 분위기상,...

 

작업을 마치고 내려온 장교, 손을 씻으려 물통에 손을 담갔다 오물이 둥둥 떠 있는 그 물에 놀라지만 이미 늦은 일. 모래를 한 줌 움켜쥐고 손에 비비더니, 손수건을 꺼내 닦고, 옷에 쓱쓱 문지른 후, 손수건을 죄수에게 던진다. 여자의 선물이라며.

 

제복을 벗어 도랑에 던져놓고 완전히 벌거벗은 상태로 기계 앞에 선 장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짚이는 게 있기에 말려야할지 말아야할지 망설이는 여행자.

손수건을 돌려받아 기뻐하는 죄수, 그 것을 낚아채는 병사, 허리춤에 낀 그 수건을 빼내려는 동작을 취하다, 벌거벗은 장교의 모습을 보는 죄수. 무슨 일이지? 이 낯선 여행자가 명령을 내렸나? 복수의 명령을? 그의 얼굴에 떠오른 소리 없는 환한 웃음이 사라지지 않는다.Ein breites, lautloses Lachen erschien nun auf seinem Gesicht und verschwand nicht mehr.

 

그렇게도 익숙한 기계가 낯선 듯, 장교는 한동안 망설이다 침대로 올라가 눕는다. 제도기를 내려 높이를 맞추고 입에 재갈을 물고 나서야 아직 몸에 벨트를 묶지 않은 것을 알아차린다. 죄수가 병사에게 눈짓을 하고 둘이 다가가 벨트를 채워준다. 이제 크랭크를 내려야하는데 몸이 묶인 장교의 손이 거기에 닿지는 않고 병사도 그 위치를 모르니.. 그렇지만 걱정할 필요도 없이 기계 스스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침대에 진동이 오고das Bett zitterte, 바늘이 피부위에서 춤을 추고die Nadeln tanzten auf der Haut, 써레가 위아래로 움직인다.die Egge schwebte auf und ab. 여행자가 기억하기로는 제도기 바퀴 하나가ein Rad im Zeichner 새소리를 내야하는데hätte kreischen sollen 그냥 조용하다aber alles war still, nicht da.

 

이제 생기가 돌아와 팔팔해진 죄수는 기계에 흥미가 가는지 몸을 굽히고 펴며 손가락으로 병사에게 무엇을 가리키기도 하는데, 이 모습을 보는 여행자의 마음이 불편해진다. 참다못한 그가 이제 돌아가라Geht nach Hause 하자, 병사는 몸을 돌리는데, 죄수는 이를 벌로 받아들인 모양empfand den Befehl geradezu als Strafe. 손을 비비며 남아있게 해달라는 그에게 여행자가 고개를 흔들자 아예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애원한다.kniete er sogar niede. 바로 그때 갑자기 제도기에서 나는 소리. 올려다보니 톱니바퀴들이 돌아가는 듯하더니, 무슨 거대한 힘이 내려 누르기라도 하는 듯als presse irgendeine grosse Macht den Zeichner zusammen 밑으로 떨어진다. 그러자 다른 부분들도 돌아가기 시작하고 떨어지고.... 이 와중에 죄수에게 돌아가라는 명령을 내릴 것도 잊고, 병사와 함께 그 떨어진 것을 들어 올리려다 바퀴가 돌아가는데 놀라서 둘은 뒤로 물러선다.

 

이 소란 통에 잊었던 더 중요한 것, 고장 난 기계로부터 장교를 꺼내주기. 그제야 장교 쪽을 보니, 써레가 판결문을 ‘쓴 것’이 아니라 아예 진동하면서 바늘을 ‘꽂아’버렸다.(그 다음 끔찍한 묘사 생략) 어쨌든 12시간 동안 죄수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속죄Erlösung 받게 되어있다는 장교의 설명과는 달리, 그는 이미 피투성이로 죽어있고, 몸에 박힌 수많은 바늘들을 돌려놓을 수도 없는 상태. 하지만, 이마에 철심이 박힌 상태durch die Stirn ging die Spitze des grossen eisernen Stachels.에서도 장교의 표정은 평안하고 확신에 차있는 듯der Blick war ruhig und überzeugt.

 

병사와 죄수와 함께 ‘찻집Teehaus'을 찾는 여행자. 그곳에 부두노동자들이 앉아있는 테이블 밑에 숨겨져 있는 비석 하나. 그 밑에 전 사령관이 묻혀있다고. 성직자들이 그가 공동묘지에 묻히는 것을 반대했고, 다른 적당한 곳을 찾을 수도 없어 할 수 없이 여기에 묻었다는 설명. 비문 내용의 일부, “그가 다시 부활해 유형지를 정복할 추종자를 여기에서 이끌 것이라고. Der Kommandant wird auferstehen und aus diesem Hause seine Anhänger zur Wiedereroberung der Kolonie führen."

 

증기선을 타고 유형지를 떠나는 여행자. 자기를 따르려던 두 사람을 마지막 순간에 따돌리는 그. Sie hätten noch ins Boot springen können, aber der Reisende hob ein schweres geknotetes Tau vom Boden, drohte ihnen damit und hielt sie dadurch von dem Sprunge ab.

 

-끝-

 

 

http://www.gutenberg.org/files/25791/25791-h/25791-h.htm